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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제갈량은 서주 출신이지만 서주대학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본문



 정확히는,. 제갈량의 의부인(생부 제갈규는 사망) 제갈현이 원술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제갈량전]



원술(191)의 초기 직책은 후장군 겸 남양태수였고[원술전], 제갈현은 그에 의해 예장태수(보통 삼국지게임의 시상)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한 조정(동탁)이 예장태수를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고, 붕 떠버린 제갈현은 친하던 유표에게 의지합니다.



제갈현 사후, 제갈량은 그대로 양양 근교에 있으면서 사대부(호족)들과 친분을 쌓으며 유유자적했지요. 그리고





??? : 젊은 나이에 은거라니 어림도 없지, 삼고초려 빔! [제갈량전]





 ps. 제갈근은 전란을 피해 양주로 내려왔습니다. 이 전란이 서주대학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무위키에는 그냥 떡하니 서주대학살 링크가 걸려있던데, 대체 어떤 사료를 근거로 한 걸까요?



 사실 제갈근은 낙양으로 유학을 갔었기 때문에, 사례의 전란때문일 수도 있고, 계모를 섬겼다고 했기에 남양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라면 본적인 서주 낭야로 돌아왔을 수도 있습니다만, 낭야는 학살 대상이 아닙니다.

취려, 수릉, 하구, 저릉은 하비국이고, 팽성은 팽성국입니다. 굳이 가까운 전란을 따지자면 여포가 도망친 이후일까요?



 ps2. 

한말에 난을 피해 강동으로 왔다. 마침 손책이 죽었는데, 손권이 매형인 곡아(曲阿)사람 홍자(弘咨)가 그를 보고 빼어나다 여겨 손권에게 천거하니, 노숙 등과 함께 같이 빈객의 대우를 받았고, 후에 손권의 장사(長史)가 되었으며 중사마(中司馬)로 전보되었다. [제갈근전]

 제갈근은 완전히 관련이 없군요. 오해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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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3

아스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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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조조에 의해 고향을 잃은 제갈량이 조조를 쓰러트린다는 이야기가 드라마틱하다는 이유가 아닐까.....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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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2">사실 조조가 대학살한 서주 하비국은 조조의 고향인 초국 패현과 매우 근거리에 있습니다.</font>

<div><font size="2">애초에 남의 고향 탓하기 전에 본인 고향을 초토화 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nbsp;</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패현(소패)는 조조vs유비vs여포의 각축장이 되니까요.</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조조의 군대는 당시 대학살로 수십만을 죽일만한 능력(!)이 없었던게 사실이지만, 그 조조니까요.</font></div>

<div><font size="2">뭔가 학살의 비법이 있지 않았겠습니까..</font></div>

사나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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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2">ㅇ 지리상으로 보면 의외다 싶지만, 서주에서 제일 가까운 주는 양주였습니다.</font>

<div><span style="font-size: small">많은 서주 출신들이 양주로 갔고, 많운 양주 출신들이 서주로 갔으며, 서주출신과 양주출신은 서로를 천거하기도 했습니다.</span></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오군의 손견이 첫 군생활을 시작한게 하비현이고, 전란이 일어나자 많은 서주 출신이 양주로 도망갔고,</font></div>

<div><font size="2">서주자사로 유명한 <b>도겸은 단양(건업</b>이 있던 단양군) 출신이고, 그의 군대는 <b>단양병</b>이었죠.</font></div>

<div><font size="2">서주 동해군 출신 <b>왕랑은 회계태수</b>였으며 <b>노숙과 보즐이 하비국</b> 출신. 이 둘은 서주대학살과 관계있을 수 있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ㅇ 사실 서주와 양주가 분리된 건 진규/진등 부자의 역할이 컸는데, 조조의 고향 패국의 상이 패국상 진규였고, 그 아들 진등이 광릉태수였죠.</font></div>

<div><font size="2">이 둘은 조조가 서주를 먹고 지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었죠.</font></div>

<div><font size="2">&nbsp;진규는 조조가 서주를 먹는데 대역할을 했고, 진등은 서주를 손책의 손아귀에서 지켜냈죠. 민물고기 회먹다 죽었습니다만.</font></div>

알카시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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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리다곤 해도 제갈 형제를 부하로 두었는데도 패망한 원술... ㅠㅠ 그러고 보면 손책이나 노숙 같은 걸물들도 원술 휘하에 있었는데 원술이 매력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섣부른 칭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들 원술을 배반했네요.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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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2">&nbsp;사실 원술의 경우 실제 군신관계가 성립할 정도로 상하가 명백했던 부하 자체가 드물었습니다.</font>

<div><div><span style="font-size: small">&nbsp;명망있는 원가의 수장이자 유이한 생존자, 그리고 후장군이자 명사로서 "천거"하는 수준이었지요.</span></div>

<div><br /><span style="font-size: small">유비가 원담을 청주자사로 추천했다고&nbsp;</span><b style="font-size: small">원담이 유비 휘하가 되는건 아닌</b><span style="font-size: small">&nbsp;것 처럼 말이지요.</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small">&nbsp;손견을 원술의 휘하로 보는 것도 맞지 않은게, 애초에 그 손견이 남의 아래 있다는 것도 웃기고 말이지요. 동맹 정도가 적당하겠지요.</span></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nbsp;손책의 경우에는 부하라고 보기보단 동맹세력의 후임자로서 <b>후견인</b> 정도가 정확하겠네요. 배반했지만.</font></div></div>

<div><font size="2">물론 원술이 손책을 킹받게 한데다(여강태수) 명분(칭제)도 쥐어줬으니 원술의 자업자득이지만요.</font></div>

오메가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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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을 죽였다는데 무슨 수로 죽인걸까?는 궁금하기는 했습니다.



당시 군사력으로 한번에 씨몰살을 한 거 같지는 않고, 특유의 과장서술이거나 '결과적으로' 수십만을 죽인 거라던가 뭐 그런 식이었으려나요?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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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2">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하비국을 확실하게 조진건 서주대학살보다는</font>

<div><font size="2">오히려 이후의<b>&nbsp;하비성 포위전에서 기수와 사수를 죄다 하비성 내부</b>로 끌어들였던게 더 임팩트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공식적으로 죽인건 <b>관도대전 이후 원소의 부하를 갱살</b>한게 더 컸을 것이며,<b> 광범위적으로 죽인건 강제이주</b>가 제일 컸겠지요.</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조조의 행보 자체는 적벽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야 하지만, 학살은 딱히 구분지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결같았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2차창작의 조조중 제일 역겨운건 조조가 "법과 원칙"을 지킨다고 주장하는게 제일......하. 패도(웃음)</font></div>

귀찬쿤요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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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대학살이 2년에 걸쳐 2번 일어났던 것도 있고, 실제로 당시 서주의 호구가 후한서 군국지 기준으로 270만에 몰려온 유민들까지 생각하면 더 많았었죠. 그런 상황에서 조조가 성을 무너뜨릴 때마다 가축까지 철저히 쓸어버리라고 해서 일어난 광범위한 학살을 해서 사람들이 수만~수십만 단위로 죽었을 거고, 거기서 나온 유민들도 길바닥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았을테니....

초폐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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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이유야 모르겠지만 화봉요원에서 나온 것처럼 사실은 수천~수만 언저리만 죽였는데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100만 서주민을 학살하여 그 시체로 강이 막혔다." 라고 한게 아닐까 의심됩니다.



<div>당시 조조한테는 그만한 숫자의 서주민을 학살할 병력도 부족했지만 무엇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div>

<div>본인도 군량이 딸려서 끙끙거리는데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도망치는 서주민을 일일이 찾아 학살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느니 얼른 도겸을 치워버리고 점령을 마치는게 사리에 맞죠.</div>

<div>그 후로도 유비, 여포를 상대할 때도 세력권이 인접한 군웅들이 있으니 그런걸 하느라 힘빼는건 그리 납득이 가질 않고요.</div>

SpaceCore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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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정사는 말합니다. 회전에서 지고 성안에 처박힌 도겸을 못죽여서 하비 주위를 싹쓸이하셨다고.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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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한 죽인건 맞습니다. 근데 그게 크게 영향을 못미친거죠.



<div><span style="font-size: 9pt">실은, 서주는 서주대학살 이후에도 온갖 군웅의 집결지가 됩니다. 여포가 뒤진 이후에도 유비가 탈주해서 계속 싸웟죠.</span></div>

<div><br /></div>

<div>조조가 마무리 지은 후에는 청주의 원담과 태산의 장패가 싸웠습니다. 그사이에 손책이 조조 뒤를 살살 노리는걸 진등이 막았고요.</div>

<div><span style="font-size: 9pt">제갈근 탈주 타이밍을 봤을 때, 아마 유비가 재기했을 때는 이미 서주가 한계에 도달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span></div>

<div><br /></div>

<div>&nbsp;개인적으로 조조가 서주대학살을 통해 찾았던건 다름아닌 부친의 재산(과 유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div>

<div>아니 영제때 금은보화로 삼공을 해먹었던게 조숭이니까요.</div>

SpaceCore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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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face="맑은 고딕" size="2">수천이 죽었든 수십만이 죽었든 학살은 학살.</font>

<div><font face="맑은 고딕" size="2">정사에서는 서주에 대한 전방위적인 초토화 작전이 있었는데 수십만명이 식량 결핍, 병과 추위, 치안 부재 등을 생각하면 그걸로 끝장난거죠.</font></div>

<div><font face="맑은 고딕" size="2">정사에서 유비한테 진등이 서주의 인구 100만 얘기하는데... 원래 서주의 인구하고 이주한 사람들이 몇 명이었나를 생각해보면... 이미 서주는 골로 간거임.<br /></font>

<div><div>

<div class="autosourcing-stub-extra" style="line-height: 1.5; color: #333333; text-align: justify; zoom: 1; opacity: 1">

<p style="margin-top: 11px; margin-bottom: 7px; padding: 0px; line-height: 1.5; font-size: 12px; font-family: Dotum"><br /></p></div><span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굴림, Gulim; font-size: 16px; text-align: justify"></span></div></div></div>

떠돌이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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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에서 제갈량의 고향인 낭야도 2차 학살 당시 잔륙(그냥 싹 죽였다는 의미)했다는군요.

도겸전에서도 낭야를 평정했다고 하니 낭야도 쓸리긴 한 듯 합니다.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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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자치통감에는&nbsp;</div>

<div><br /></div>조조가 부임하여 남녀 수십만명을 사수에서 파묻어 죽이니 물이 흐르지 않았다 (중략)&nbsp;

<div>여, 수능, 하구를 공격하여 빼앗고 모두 도륙하였는데, 닭과 개 역시 다 없애니 텅빈 읍에는 다니는 사람이 다시없게 되었다. [후한3 129]</div>

<div><br /></div>

<div>&nbsp;(전략) 낭야와 동해에 이르렀는데, 지나는 곳은 다 부서트렸다. 돌아오는 길에 담현의 동쪽에서 유비를 격파하였다.</div>

<div>&nbsp;도겸이 두려워서 달아나 단양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때마침 진류태수 장막이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를 받아들이자, 조조가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br />

<div><br /></div>

<div>라고 나옵니다.</div></div>

SpaceCore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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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span style="font-size: 9pt">제갈근전에서 제갈근이 서주대학살을 경험했고 그 피해에 대해 언급했던거 보면 마냥 제갈 가문과 제갈량이 서주대학살에 아주 피해가 없지는 않을꺼임.</span><span style="font-size: 9pt">&nbsp;</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그리고 제갈현이 예장태수가 언제 됬는지 기록이 정확하지가 않음.</span></div>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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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font size="2"><br style="font-family: sans-serif" /><span style='font-family: &quot;Courier New&quot;, Courier, monospace'>한말에 난을 피해 강동으로 왔다. 마침 손책이 죽었는데, 손권이 매형인 곡아(曲阿)사람 홍자(弘咨)가 그를 보고 빼어나다 여겨 손권에게 천거하니, 노숙 등과 함께 같이 빈객의 대우를 받았고, 후에 손권의 장사(長史)가 되었으며 중사마(中司馬)로 전보되었다. [제갈근전]</span></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nbsp;제갈근이 난을 피해 강동으로 온 시점에서 손책이 죽었으니 그 난은 200년 즈음의 난, 그러니까 여포 사망(198) 이후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서주대학살은 192-3년의 일이니, <b>제갈근과는 전혀 관계가 없</b>게 되는군요.</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nbsp;월급 루팡하면서 글작성 하느라 제대로 확인 못했군요. 죄송합니다.</font></div>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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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face="Courier New, Courier, monospace" size="2">제갈현은, 자치통감에는 195년 사망으로 기록되어있네요. [후한서3 189p] 적어도 195년 이전.</font>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div style="font-family: dotum; line-height: 1.4"><font size="2" face="돋움"><span style='font-family: &quot;Courier New&quot;, Courier, monospace'>초평 4년(193년) 봄, 견성(鄄城- 연주 제음군 견성현)에 주둔했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양도(糧道-군량 수송로)를 끊자 원술이 군을 이끌고 진류로 들어와 봉구(封丘-진류군 봉구현)에 주둔하고, 흑산적의 남은 무리와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은 장수 유상(劉詳)을 광정(匡亭)에 주둔하게 했다.&nbsp;</span></font></div>

<div style="font-family: dotum; line-height: 1.4"><font size="2" face="돋움"><span style='font-family: &quot;Courier New&quot;, Courier, monospace'>&nbsp;</span></font></div>

<div style="font-family: dotum; line-height: 1.4"><font size="2" face="돋움"><span style='font-family: &quot;Courier New&quot;, Courier, monospace'>태조가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대파했다. 원술은 봉구(封丘)로 물러나 지켰고 이에 봉구를 포위했는데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진류군 양읍현)으로 달아났다. 이를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당도하자 수로의 물을 터뜨려 성에 물을 끌어들였다. (원술은) 영릉(寧陵-예주 양국 영릉현)으로 달아났고 또다시 추격하자 구강(九江-양주 구강군)으로 달아났다.&nbsp; [무제기]</span></font></div></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원술이 193년 초에 조조에게 영혼까지 털려서 구강까지 달아났으니, 예장을 장악했다고 하면 이 시기가 맞는 것 같네요.</font></div>

<div><font size="2">서주대학살이 193-194이었으니, 제갈현은 "그 시기" 이전에 탈주한 걸로 보여집니다.</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nbsp;아 더럽게 촉박하네요. 189.9가 십상시인데 겨우 4년 사이가 이렇게 복잡하다니</font></div>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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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2">제갈현, 제갈량, 제갈근, 제갈균은 생존이 확인되었지만, 나머지는 알 수 없군요.</font>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학살을 하비에서 했다지만 그 여파가 고작 하비 일국에 머물렀을리는 없고요.&nbsp;</font></div>

<div><font size="2">적어도 집안 자체는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겠네요.</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뭐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었으니 제갈탄이 나왔겠습니다만.</font></div>

팜므로rey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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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삼국지톡이요...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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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2">아 삼국지톡 재밌다는데 한번 봐야 하는데 이거 손에 안잡히네요.</font>

abc3511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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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체 사서 문제점이 특정 인물의 행적 추적은 정말 좋은 반면에 세세한 타임라인 맞추는 것은 본인이 재조립을 해야 한다는거죠. 이런 면에서 편년체가 보기 쉽다고 할까요.

<div><br /></div>

<div>그리고 서주대학살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음은 노숙의 발언을 들어봐도 알 일이긴 하지만 이 건이 유독 특이하다고 말하기엔 삼국 정립 이후에 파악된 인구수를 보면 그저 눈물이 날 일이겠지요. 5000~6000만에 달하던 인구가 꼴랑 800만 파악하는 정도로 추락했던 시대이니 말입니다.</div>

<div><br /></div>

<div>삼보의 난과 같이 난세의 정점? 이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은 하지만 저 사건들만이 이상하다고 말하기엔 시대 자체가 참으로 미쳐가던 시대였으니.</div>

사나에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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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2">&nbsp;기전체에서 그래도 "기"는 시간기록이 뚜렷한데 비해 "전"은 정말이지.&nbsp;</font>

<div><font size="2">특히, 자료가 많은 "위"나, 진수가 쉽게 접했을 "촉"에 비해 "오" 자료는 오서, 강표전, 조만전 죄다 뭔가 하나가 부족한 자료들이다보니.</font></div>

<div><font size="2">다 필요 없고 당장 손견전이 다른 정사나 후한서와 타임라인 안들어맞는건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송지의 비아냥은 덤.</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nbsp;사실 조조의 수많은 폭정은 그야말로 가정맹어호 그 자체였는데 서주대학살만 부각되는게 신기하죠.</font></div>

<div><font size="2">겨우 그딴 걸로(!) 욕먹는 조조가 아닌데 말이죠.</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div><font size="2">노숙전의 "</font><span style='color: #951015; font-family: &quot;Courier New&quot;, Courier, monospace; font-size: 13.3333px'>회수, 사수 유역은 자손을 남겨 둘 곳이 못 되오.</span><span style="font-size: small">"&nbsp; 발언은 단순히 서주대학살만 가리키는게 아니라,</span></div>

<div><font size="2">여포와 유비, 그리고 조조의 각축전에 원술의 학정과 도적의 난립을 전부 포함하는 발언이겠지요.</font></div>

<div><font size="2"><br /></font></div>

abc3511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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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체 사서는 시추에이션 퍼즐 맞추는 느낌이긴 하죠.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편년체가 정말 좋다고 생각되는게, 인물 행적도 데이터베이스화 되있는 경우엔 이름 검색만 하면 어느정도 나오니까요.

<div><br /></div>

<div>그리고 조조 악행 중 가장 큰 것은 겨우 목숨 연명 중인 후한 조정에 막타 친 것이고, 후대 관점으로 보면 그랬으면 본인이 통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해서 이도저도 안된 점이라고 할까요. 태생적으로 한계가 뚜렷한 왕조를 사실상 개창해서 물려줬고 그 보다 못한 서진은 알다싶이.</div>

<div><br /></div>

<div>노숙전의 내용이야 그렇죠. 서주대학살만 가르키는 것은 아니고, 사실 특정 사건의 영향력을 거론하기엔 난세 자체가 괴멸적이었다는 말밖에 못하겠네요.</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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