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서양풍 환상물에서 마법은 대개 '공학적'으로 묘사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불만이 많은 "파이어볼"을 단적으로 언급해보겠습니다. 많은 환상물, 특히나 다른 문명과의 크로스오버가 이루어지는 매체에서 "파이어볼"은 근본적으로 화염방사기와 같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탄소 유기체를 파괴하는 방식은 동일하죠. 유일한 차이는 화염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마법'이라는 블랙박스로 치환하는 점일 뿐입니다.
이런 식의 묘사가 유감스러운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나 '마법의 신비적 면모'가 사라진다는 점일 겁니다. 가솔린이 "마나" 따위로 대체되었을 뿐, '마법'이란게 그냥 공학의 산물처럼 묘사된다는거죠.
물론 이런 묘사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20년, 30년 전이었다면 신선한 시도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한국 환상물의 패시브처럼 주류를 형성한다는게 저로서는 좀 아쉽네요.
외국에도 이런 면모가 없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한동안 유행하던 일본식 밈인 "강철은 불에 약하다. 그건 상식이지" 같은게 (정작 물리학적으로는 실소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공학적 마법'이라는 발상에 기초하는 대표적인 예시죠.
(이건 그냥 가설입니다만, 한국의 서양풍 환상물은 '파이어 데미지', '일렉트릭 데미지'를 따지는 드래곤 퀘스트, 디아블로2 같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 유입된 것이 이런 기조가 생겨난 원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적으로 서양물이라면 해리 포터에서의 마법 묘사, 그리고 일본이라면 타입문에서의 마법 묘사만 하더라도 좀 근본적인 발상에서 차이가 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차이의 중점 중 하나는 '공학적'인 면모에 초점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면모에 초점을 기울이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단적으로 '잠긴 문을 여는 마법'을 생각해보죠. 만약 '공학적'인 발상에 기초한다면 '잠긴 문을 여는 마법'은 무슨 구체적 방식을 취하건 간에 '문의 금속으로 된 열쇠 구멍에 물리적 작용을 가하여 문을 여는 절차'로 실현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묘사를 봤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이런 식의 발상에 기초한 마법을 구사하는 '판타지'의 마법사는 전자적으로 잠긴 문은 열지 못한다는 식의 묘사가 충분히 나올 수 있겠죠 ("테챠! 어째서 내 마법이 통하지 않는거냐!", "아아, 이게 바로 도어락이라는 것이다.")
다만 '개념적'인 발상에 기초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게 어떻게 실현되건 '잠겼다'라는 점일 것입니다. 그게 전통적인 문이건, 도어락이건, 인터넷의 포털이건, 사람의 '잠긴 마음'이든 말이죠. '잠긴 문을 여는 마법'은 이런 현상들에 다 공통적으로 통한다고 묘사되어야할 것입니다.
타입문계에서의 전통적인 예시라면 이른바 '죽음'일 것입니다. (제 칼데아에서 열일하고 있는) 료우기 시키의 '직사의 마안'은 '죽음'을 실현시키지만, 그 '죽음'은 물리적/공학적으로는 다양하게 실현됩니다. 사람이라면 심장이 멈추고, 물질이라면 분자 결합이 해제된다는, '공학적'인 관점에서는 판이한 일들이 '죽음'이라는 점에서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집니다. 현대 공학과는 근본적인 세계관 자체가 다르죠.
사실 실제 현실 역사에서의 '마법'이 기초하는 발상도 이러한 '개념적' 세계관에 기초합니다. '이 머리카락을 통해서 저 놈을 저주할 수 있을거야'라는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공감주술적 발상은 현대의 동종요법 같은 믿음에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옵니다. (단언컨대 혈액형 성격설과 <물은 답을 알고 있다>야말로 현대 마법의 정수입니다!!)
(한국 서양풍 환상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D&D만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화구'를 시전하려면 박쥐 구아노와 유황 덩어리가 필요하죠. '미신적인' 요소를 의외로 잘 함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현대인들이 여전히 갖고 있는 이런 미신적 발상이야말로 환상물에서 차용할만한 아이디어들을 무궁무진하게 포함하고 있기에, 저는 천편일률적으로 '공학적'인 발상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 환상물의 기조가 유감스럽습니다.
어쩌면 제가 근본적으로 착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점은 한국 환상물의 의의가 '환상'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있습니다. 환상물 독자/소비자들이 바라는 것은 '갑질', '사이다' 등 다른 면모이고 환상세계가 도입되는 이유는 '갑질', '사이다' 등을 용이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죠. 그렇게 된다면야 "환상물에서 '환상'이 얕게 다뤄지면 어떡해!"라는 불만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방랑기사로 살아가는 법> 등 '갑질', '사이다' 등을 노골적으로 노리면서도 '환상' 같은 요소 역시 잘 만족시키는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은 꽤 긍정적입니다. <방랑기사>의 마법 묘사는 상당히 만족스러웠거든요. 앞으로도 이런 변화가 더 확산되었으면 하는게 제 개인적인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