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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경징은 강화전투 패배의 원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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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징에 대한 인식은 세기의 졸장 이러한 식으로 인식됩니다. 우자점 좌경징 이런 식으로 희화화되기도 하구요. 그 이유는 강화도 전투 시에 강화 전역 총사령관으로 말아먹었다는 것이지요.





연려실기술 제26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일찍이 적이 침입하였다는 보고가 급히 들어오니 조정과 온 나라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임명하여 강화도를 막아 지킬 계책을 세웠다. 임금이 체찰사(體察使) 김류(金瑬)에게 묻기를, “경의 아들이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경징이 다른 재능은 없으나 적을 막고 성을 지키는 일에 어찌 감히 그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그 부장(副將)으로 삼고 수찬 홍명일(洪命一)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서 강화도에 들어가 지키게 하였다.


 


 


경징이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려 하자 장신이 이르기를, “나는 지휘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하여 서로 배척하고 알력이 심하였다. 경징은 스스로 강화도를 금성 탕지(金城湯池)로 믿고 적이 날아서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태평스럽게 방종하여 날마다 술만 마셔 대며 주정을 일삼았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소식을 들을 수 없어도 임금을 걱정하지 않았다. 대군과 대신이 간혹 말하는 일이 있으면 경징이 말하기를,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이때를 당하여 대군이 어찌 감히 나와 말하려 하며, 피난 온 대신이 어찌 감히 나를 지휘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김포(金浦)와 통진(通津)에 있는 나라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배로 실어왔으나, 경징의 친구 이외에는 한 사람도 얻어먹은 사람이 없었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큰 소리 치기를, “아버지는 체찰사요 아들은 검찰사니 국가의 큰일을 처리할 자가 우리 집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였다. 별좌 권순장(權順長)과 생원 김익겸(金益兼)과 진사 심희세(沈熙世)와 윤선거(尹宣擧)잡기(雜記)병자록(丙子錄)에는 권순장과 김익겸 두 사람으로 되어 있고,강도록(江都錄)에는 심희세와 윤선거로 되어 있다. 등이 글을 올려 책망하기를, “와신상담(臥薪嘗膽)이 지금 할 일이요, 술을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였더니, 경징 등이 더욱 노여움을 드러냈다.


 


 


이런 인식은 연려실기록에 의거하는 것이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해당 기록에 대해 실록을 참고하면 연려실기술과 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인조실록 34, 인조 15221일 신묘 1번째기사 1637년 명 숭정(崇禎) 10


 


김경징은 비록 그의 검찰(檢察)하는 임무가 적을 방어하는 일과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궁(嬪宮원손(元孫)이 모두 병화(兵禍) 중에 빠져 있는데도 일찍이 털끝만큼도 돌보며 염려하는 뜻이 없이 배를 타고 도망하느라 겨를이 없었으니, 원손이 다행스럽게 모면한 것은 하늘이 실로 도운 것입니다.


 


 


만약 극형으로 복주(伏誅)시키는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종묘 사직의 영혼을 위로하며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겠습니까. 신들이 즉시 합계(合啓)하려고 하였으나 간원 성상소(諫院城上所)가 유고(有故)이기에 감히 소차(小箚)로 진달하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원하게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율대로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율대로 처치하는 것은 혹 과할 듯싶다."하였다.


 


실록을 보면 검찰사 직은 강화 전투와 관련해서 병력을 이끄는 직책도 아닙니다. 게다가 연려실기술에서 말하는 술만 진탕 먹어서 방비를 하지 않았다는 구절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거느린 군사가 적어서 죄를 묻기 힘들다는 답변이 올 뿐입니다. 두 기록이 너무 달라서 좀 당황스러운 시점인데, 그럼 검찰사 직이 무슨 업무를 담당했고 누가 주로 임용되었으며, 당시 강화전투의 총사령관, 방비 태세 등을 교차 검증하면서 알아보겠습니다.


 


 


1, 검찰사가 무슨 업무를 담당하고 주로 누가 임용 되었는가?


 


 


선조실록 100, 선조 3158일 임진 7번째기사


 


검찰사(檢察使) 유근(柳根)에게 특별히 하서하시어 다방면으로 속히 재촉해 이미 군량을 실은 선척으로 하여금 곳곳마다 지연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여 제 날짜에 경강(京江)에 도착하게 함으로써 초미(焦眉)의 급함을 끄게 하소서.


 


 


선조실록 26, 선조 25528일 정해 3번째기사


 


"대탄(大灘)의 방비는 지금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병사의 증원과 군량·군기 등의 일은 오로지 강원 감사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감사는 검찰사(檢察使)가 있는 곳을 떠나지 말고 더욱 힘써서 조처하라는 뜻으로 본도 감사와 도검찰사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해당 기록이나 조선왕조실록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군량보급에 관련된 업무를 맡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 전투에는 투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감사에게 보호 받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말이지요.


 


또 주로 임용되던 사람의 관직 커리어를 보면 언관직 등의 문관직입니다. 이양원의 관직 커리어를 보면 홍문관 교리 등 언관직을 거쳤구요. 또 김경징도 판윤이었다가 검찰사에 임명된 것이니 이것은 말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2. 그럼 누가 강화 전투의 지휘관이었는가?


 


 


혹자는 아무리 검찰사직이 그런 업무고, 그런 사람들이 임명된 자리라고 한 들 강화 전투에 김경징이 어떤 권한을 가졌는지에 대한 것은 다른 일이라 주장할 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런 지적이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인조실록 33, 인조 141230일 경자 3번째기사 1636년 명 숭정(崇禎) 9


 


김상헌이 아뢰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이 그의 형에게 글을 보내기를 본부의 방비를 배가해서 엄히 단속하고 있는데, 제지를 받는 일이 많다.’고 했답니다. 장신은 일처리가 빈틈없고 이미 오래도록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신임 검찰사가 절제하려 한다면, 과연 제지당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방수(防守)하는 일은 장신에게 전담시켰으니, 다른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도록 전령하라."하였다.


 


 


그런 지적과 같은 걱정은 당시에도 이미 제기된 문제입니다. 김경징은 김류의 아들이고, 정권 실세의 아들이 품계를 무시하고 실 권한을 쥐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인조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해당 지역의 지휘관은 명백히 장신이었고, 강화 전투가 인조 1412월에 이루어졌는데 장신이 강화유수로 임명된 것이 같은 년 3월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이 그랬습니다. 게다가 김경징이 주로 문관직을 거친 반면 장신은 그 이전부터 꾸준히 무관직을 거쳤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장신이 당시 총사령관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3. 당시 방비 태세는?


 


 


연려실기록과 실록 양자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대목은 당시 강화의 성곽이 허물어져 농성하기 어렵다는 것과 강화에 왕실의 비빈들이 피난 갈 때 김경징이 친지를 먼저 챙겨서 원망했다는 기록입니다.


 


 


인조실록 25, 인조 996일 정축 1번째기사 1631년 명 숭정(崇禎) 4


 


수원 부사(水原府使) 장신(張紳)이 상소하여 강도(江都)의 편의(便宜)에 대하여 진달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강도에 성을 쌓는 일은 체신이 출사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화량(花梁영종(永宗초지(草芝제물(濟物)4()를 옮겨 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종조(祖宗朝)로부터 연해(沿海)에 진()을 설치한 목적이 오로지 왜구(倭寇)와 해적(海賊)을 방비하기 위해서인 만큼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고, 강도에서 적을 방어하려면 전적으로 수군에 의지해야 하는데 임금이 그 곳으로 옮길 경우 제진의 전선과 병선을 강도에 모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약간의 토병(土兵)을 철수하여 옮기는 것이야 본디 큰 일이 못 되겠지만 설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위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강화 전투에 있어서는 수군이 중요했습니다. 1차적으로 수군이 막아야 하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성곽이 허물어졌다는 기록을 볼 때 농성이 어려운 상황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왕실의 비빈이 원망했다는 기록을 보면 의문점이 하나 듭니다. 아무리 친지가 중요하다고 한 들 이들은 가장 먼저 보호해야할 사람들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면 왜 한 번에 옮기지 않았을까요? 한 번에 옮기는 것이 여러모로 이로울텐데 말입니다. 이것을 고의적으로 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결국 못했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수군이 중요했음에도 운용할 수 있는 배는 얼마 없으며 강화 안에 농성하기에도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화의 방비태세는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4. 그럼 김경징의 죄는?


 


 


방어 임무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할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럴 권한을 가진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당시 방비태세는 별로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면 그의 죄는 무엇이기에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조실록 35, 인조 15621일 무오 1번째기사 1637년 명 숭정(崇禎) 10


 


당초 강도(江都)로 들어갔을 때에 먼저 제 집안 일행을 건너게 하고 묘사와 빈궁(嬪宮)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을 못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이 사람은 전하의 죄인일 뿐더러 실로 종사의 죄인입니다. 또 영기(令旗)로 제 친한 사람만 건너게 하고는 사민(士民)들은 물에 빠지거나 사로 잡히게 하였으니, 통분하여 견딜 수 있겠습니까.


 


나루턱을 장차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빨리 묘사(廟社)를 받들고 빈궁과 대군(大君)에게 말에 오르기를 청하여 뒷문으로 달려 나갔더라면 배를 탈 수 있었을 것인데, 윤방이 쥐처럼 달아나 민가에 숨었다가 내관에게 들켰습니다. 묘사의 신주를 더럽히고 잃었을 뿐더러 마침내 적진(敵陣)에 출입하였습니다.


 


 


인조실록 34, 인조 1534일 계묘 2번째기사 1637년 명 숭정(崇禎) 10


 


, 적병 수십 명이 작은 배로 강을 건너오자 화살 하나 쏘아보지 않고 먼저 도망하여 2백 년 동안 지켜온 종묘 사직을 하루 아침에 몰락되게 하고 빈궁과 대군을 모두 싸움터에 빠져들게 하였으며, 남녀 노소를 죄다 도륙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김경징과 장신은 그들의 노모를 적진에 버리고 달아나 돌아보지도 않았으며.....


 


 


김경징의 죄목으로 지명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빈궁을 버리고 친지들을 먼저 챙긴 것, 강화 함락 당시 대군들은 챙기지 않고 자기 혼자 도망친 것 그리고 종묘의 신주를 지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 탄핵 상소에 원훈의 아들이라니 하면서 김류와 같이 엮이는데, 전후 김류에 대한 탄핵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음을 생각해보면 김류가 탄핵당하면서 김경징이 피해를 본 것이라 봐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강화 전투 당시 김경징의 죄과가 어떻고 그가 죽을 죄를 지었는가에 대한 것은 가치 판단의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그가 강화전투의 원흉이라고 하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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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5

이머징16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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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투의 패전에는 장신의 비중이 높은 건 맞지만, 김경징이 자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결과 왕족들이 강화도에서 단체로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으니 김경징의 죄가 가벼운 것은 아니죠. 그나마 사약으로 끝난 건 아버지가 인조반정의 1등공신이라는 것과 본인이 2등공신이라는 것 덕분이고요.

abc3511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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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렇죠. 저도 김경징이 자기 직분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강화 전투 패배의 원흉이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사실과 부합하지 않다는 생각이네요. 그리고 장신도 본문에 적시했듯이 배가 적은게 컸습니다.</p>

<p><br /></p>

<p>개개인의 잘못 이전에 방비태세가 그리 좋지 않았어요. 그게 가장 크고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p>

코알라87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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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건 아니지요.... 해협이 돌파당하고 청의 기병이 강화성에 돌입하는 건 말그대로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이라... 해협 쪽의 고지들에 올라가 있던 조선군은 아예 반응도 못했을 정도입니다. 김경징을 비롯한 문관 일행도 놀고 있던 게 아니라 그쪽에 있었고... 성안에서 불길이 오르고 약탈이 시작되는 걸 고지 위에서 보며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는 게... 그들이 술을 마셨느니 왕족과 가족이 잡히는데 혼자 도망갔다는 식으로 욕먹었던 사건의 진상이죠..<br /></div>

<div><br /></div>

<div>솔직히 강화도의 방어 태세가 약했다고 욕하는 것도 너무한 애기고요... 원래 수비대로 배치될 주력군이 도중에 길이 끊겨 죄다 남한산성으로 가버려 병력 자체가 없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몇몇 책임자 탓이나 하는 시점부터 모든 게 잘못되어 있지요.<br /></div>

<div><br /></div>

<div>결국 후대의 관료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라는 식으로 지침이나 내리겠다는 발상으로 역사를 기록한 게 문제라고 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아 실패한 게 아닙니다. 그런 곤경을 타파해내는 건 통상적인 관료에게는 요구할 수 없는 영웅적인 발상과 능력 그리고 실행력이겠죠. 솔직히... 욕하는 이들이라고 영웅이 되지 못한 걸 죄라고 생각한 건 아닐 겁니다. 그들이 요구한 건 소위 깨끗한 죽음이겠죠...<br /></div>

<div><br /></div>

<div>아무 승산도 없는데 병사들 데리고 꼴아박아 전멸한 유림 의병장을 희대의 충신으로 찬양하고... 명확한 승산을 따져 압도적인 적에게 어느정도 타격을 준 후 탄약이 떨어져 후퇴한 장수는 전과와 판단력을 평가하는 대신 궁지에 빠진 왕을 구하지 못한 패장이자 비겁자로서 어떻게든 패전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 온갖 중상을 퍼붓는 당시 기록들.... 특히 개인적인 주장들에게는 그 기반에 그런 발상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는 걸 감안하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br /></div>

abc3511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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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정확히 말하면 당시는 12월이라 강물이 얼어서 강화도 북쪽 갑곶은 상륙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적은 규모의 수군도&nbsp;비교적 남단인&nbsp;광성진 쪽에 있었죠.</p>

<p><br /></p>

<p>애초에 청군은 배도 없어서 공격한다고 하자 다 허세네 하면서 비웃었구요. 그런 상황에서 청군이 주변 가재를 뜯어서 갑곶으로 상륙하자 순식간에 상륙하고 끝장났지요.</p>

<p><br /></p>

<p>이게 당시 전술적인 실수인데 이건 감안해줄만한 실수고, 여튼 방어 태세가 약했던 것은 맞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상륙하면 끝일 정도로 성벽이 보수되지 않은 상태였어요.</p>

기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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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흉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책임을 다하지는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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